성경 고고학

바벨론 유수의 민낯: 알-야후두 서판이 폭로하는 '강제 동화' 비즈니스

scripture 2025. 12. 25. 21:32

리드문: "강가에서 울었도다"라는 시편의 감상은 반쪽짜리 진실이다. 바벨론 유수 기간 동안 유대인들은 토지 임대와 세금 납부, 노예 매매를 기록한 설형문자 서판을 남겼다. 알-야후두(Al-Yahudu) 서판 약 200여 점은 포로 생활이 단순한 감금이 아니라, 제국 권력의 치밀한 '인구 재배치 프로그램'이었음을 증언한다.

목차

약탈당한 기억: 서판의 발견과 분산

알-야후두 서판은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사이 이라크 남부 니푸르(Nippur) 인근 지역에서 불법 발굴되어 국제 골동품 시장으로 유출되었다. 이라크 전쟁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문화재 밀거래가 성행하던 시기였고, 이로 인해 서판의 원위치 정보, 층위, 출토 맥락이 모두 파괴되었다. 고고학적으로 치명적인 손실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약 256점의 서판은 데이비드 소퍼(David Sofer) 컬렉션, 노르웨이의 마틴 스코옌(Martin Schøyen) 컬렉션, 이라크 박물관, 예루살렘 성경 박물관 등에 분산 보관되어 있다. 2014년 로리 피어스(Laurie Pearce)와 코르넬리아 분슈(Cornelia Wunsch)가 소퍼 컬렉션 소장 서판 103점을 출판하면서 학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서판의 연대는 기원전 572년부터 477년까지 약 100년에 걸쳐 있으며, 이는 예루살렘 멸망 15년 후부터 크세르크세스 통치 시기까지의 역사를 포괄한다. 내용 분석 결과, 알-야후두는 고대 니푸르에서 남쪽으로 약 10~15km 떨어진 평원 지대로 추정된다.

유다 타운의 탄생: 강제 이주와 토지-복무 시스템

알-야후두는 아카드어로 "유다의 마을"을 뜻하며,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예루살렘에서 강제 이주시킨 유대인들을 정착시킨 신설 마을이다. 바벨론 제국은 정복한 주변국 주민들을 출신지 이름으로 명명한 마을에 집단 수용했는데, 이는 "쌍둥이 도시(twin town)" 전략의 일환이었다. 아슈켈론, 하맛 등 다른 피정복민 공동체도 니푸르 인근 평원에 유사한 방식으로 재배치되었다.

유대인들은 '토지-복무(land-for-service)' 시스템에 편입되었다. 이들은 경작할 토지를 할당받는 대가로 세금을 납부하고 군역과 노역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는 국가가 미개척 초원을 체계적으로 농경지로 전환하고, 세금 징수를 효율화하기 위한 내부 식민화 프로젝트였다. 유대인들은 반자유민(šušānu) 신분으로 분류되어 국가에 종속된 농부이자 노동자, 군인이 되었다.

바빌론 강에서 우는 유대인과 서판을 작성하는 유대인

서판 속 생생한 기록: 세금·대출·노예·통혼

서판 대부분은 계약서, 영수증, 부채 증서, 임대 문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설형문자와 바벨로니아어로 작성되었다. 일부 서판에는 아람어나 히브리어 짧은 주석이 병기되어 있어, 유대인 공동체가 자신들의 언어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음을 시사한다.

서판은 라파-야마(Rapā-Yāma)와 그의 아들 아히캄(Ahīqam) 가문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공동체의 경제활동을 상세히 기록한다. 이들은 보리와 대추야자를 주요 작물로 재배했으며, 세금을 현물로 납부하거나 은으로 전환하여 제출해야 했다. 농부들은 의무 이행을 위해 종종 은, 보리, 대추를 빌렸으며, 이는 대출업자들에게 수익 기회를 제공했다.

일부 유대인은 '중간 관리자'로 활동하며 동족 농민들로부터 세금이나 임대료를 징수하여 국가 관리에게 전달했다. 아히캄은 이러한 역할을 수행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이들은 독립적인 사업가가 아니라, 국가의 통제 아래 있는 징세 대리인에 불과했다.

서판에는 노예 매매, 가축 거래, 집 임대, 혼인 계약 등도 등장한다. 일부 서판에는 유대인 간 재산 분쟁, 동족을 상대로 한 채무 관계도 기록되어 있어 공동체 내부의 경제적 위계와 갈등을 드러낸다. 특히 유대인 여성 카샤야(Kaššaya)가 바벨로니아인과 결혼한 사례도 확인되어, 이민족과의 통혼이 제한적이나마 발생했음을 증명한다.

설형문자의 역설: 통합이 아닌 배제의 도구

알-야후두 서판이 설형문자로 작성되었다는 사실은 종종 유대인의 '성공적 통합' 증거로 해석되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약 100년간 단 한 명의 유대인도 서판을 직접 작성하지 않았다. 모든 문서는 바벨로니아인 서기(scribe)가 작성했으며, 서기들은 오직 문서 작성을 통해서만 유대인 공동체와 상호작용했다.

이는 도시 바벨로니아 공동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바벨론 시민들은 대부분 읽고 쓸 수 있었으며, 자신의 문서를 직접 작성하거나 친족·동료에게 의뢰했다.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나 아람어 알파벳 문자를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설형문자 체계에 의존한 이유는, 그들의 '선택'이 아니라 제국 권력의 강제였을 가능성이 크다.

문자는 통합의 도구가 아니라,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구조적 차이를 재생산하는 배제의 메커니즘이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거래를 기록할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타인의 손에 의해 문서화된 존재로 남았다.

나만의 에세이: 생존과 저항 사이, 문서화된 굴종

시편 137편의 "바벨론 강가에서 울었도다"는 유수의 심리적 상처를 웅변하지만, 알-야후두 서판은 그보다 더 음울한 진실을 드러낸다. 유대인들은 울고만 있지는 않았다—최소한 공적 기록에는. 그들은 세금을 내고, 땅을 빌리고, 동족으로부터 이자를 받으며, 제국의 언어로 자신의 거래를 문서화하는 데 동의했다. 이것이 정말 '부유한 삶'의 증거일까? 아니면, 생존을 위해 선택한 굴종의 기록일까?

서판을 읽다 보면, 진정한 비극은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자발적 복종'의 외피를 쓴 시스템적 억압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언어와 문자를 가졌으면서도 바벨로니아 서기를 고용해야 했고, 세금을 내며 '자유'라는 환상을 살았지만 실상은 반자유민이었다. 이는 제국이 폭력 대신 관료제와 문서를 통해 정복민을 길들이는 방식의 정교함을 보여준다.

가장 씁쓸한 대목은, 그들이 귀환을 포기하고 바벨론에 남은 이유가 '풍요'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미 제국의 톱니바퀴가 되어버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금 징수자로, 대부업자로, 중간 관리자로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억압의 피해자인 동시에 공범이 되었다. 알-야후두 서판은 단순한 포로 생활 기록이 아니라, 제국이 어떻게 정복민의 영혼까지 식민화하는지를 보여주는 냉혹한 교과서다.

참고문헌
Alstola, Tero. Judeans in Babylonia: A Study of Deportees in the Sixth and Fifth Centuries BCE. Leiden: Brill, 2020.
Pearce, Laurie E., and Cornelia Wunsch. Documents of Judean Exiles and West Semites in Babylonia in the Collection of David Sofer. Bethesda: CDL Press, 2014.
Wunsch, Cornelia. Judaeans by the Waters of Babylon: New Historical Evidence in Cuneiform Sources from Rural Babylonia in the Schøyen Collection. Cornell University Press, 2022.
Waerzeggers, Caroline. "Cuneiform Writing and Power at Yāhūdu and its Environs." In Judíos en Babilonia: Textos y estudios, edited by Daniel Justel Vicente, 33–57. Madrid: Ediciones San Dámaso, 2023.
Fadhil, Aminah Al-Bayati. The Archive of Zababa-šarru-uṣur: Texts from the Iraq Museum. Dresden: ISLET,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