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고고학

무라슈 문서: 바벨론 유수 이후, 유대인은 어떻게 은행가가 되었나

scripture 2025. 12. 25. 22:08

리드문: 알-야후두 서판이 끝나는 곳에서 무라슈(Murašû) 문서가 시작된다. 기원전 5세기 니푸르, 야곱(Jacob)의 아카드어 변형인 '에기비(Egibi)'와 '들고양이'를 뜻하는 '무라슈' 가문은 페르시아 제국 경제의 심장부를 장악했다. 이들은 단순한 대부업자가 아니라, 신용장·담보 대출·부동산 관리·국제 무역 금융까지 손댄 고대 최초의 투자은행이었다. 알-야후두의 농민이 50년 만에 자본가로 변신한 비밀, 그 뒤편엔 페르시아 제국의 '민영화 프로젝트'가 있었다.

목차

730개의 점토판: 성채 안에서 발굴된 금융 제국

1893년 5월, 펜실베이니아 대학 발굴단이 니푸르 유적지 한 방의 잔해를 치우던 중 730개의 점토판을 발견했다. 발굴단은 시아파 부족의 습격 위협 속에서 언덕 위에 요새를 짓고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점토판들은 아스팔트로 밀봉된 항아리 안에 보관되어 있었고, 이는 소유주가 이 문서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방증한다.

서판은 기원전 455년부터 403년까지 약 반세기 동안의 무라슈 가문 3대와 손자 3명의 사업 기록이었다. 무라슈는 아카드어로 "들고양이"를 뜻하며, 이 가문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 니푸르에 본거지를 둔 영향력 있는 지주이자 농업 관리자, 대부업자, 은행가였다. 가문의 저택은 이난나 신전 구역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꼭대기에 자리했고, 중앙 운하 건너편 종교 구역과 마주하고 있었다.

또 다른 유대계 은행 가문인 에기비(Egibi) 가문의 기록도 함께 발견되었다. 에기비는 야곱(Jacob)의 아카드어 음역이며, 가문의 원래 이름은 아람어인 '시리크(Shirik)'였다. 두 가문의 서판은 페르시아 제국 경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1차 사료로 평가받는다.

'야곱의 아들들': 유대계 은행 가문의 탄생

무라슈 가문은 유다 왕국에서 강제 이주된 유대인 후손이었다. 네부카드네자르가 예루살렘에서 끌고 온 유대인들은 니푸르 인근 28개 정착촌에 흩어져 살았고, 그중 일부는 '텔-아빕(Tel-Abib)'이라는 이름의 마을을 이루었다. 이곳은 에스겔 선지자가 거주한 그바르 운하변 정착지였다.

에기비 가문의 수장 이틀-마르둑-발라투(Ittl-Marduk-balatu)는 바벨론식 이름을 사용했지만, 그의 본명은 아람어 '이디나(Nathan의 아카드어 변형)'였고, 조상 중 한 명의 이름은 '벨-야우(Bel-iau)'로 이스라엘의 신 야훼를 명백히 지칭한다. 당시 많은 유대인이 생존을 위해 바벨론식 이름을 채택했지만, 가족 내부에서는 히브리어와 아람어 이름을 유지했다.

무라슈 문서에 등장하는 인명의 약 8%가 명백히 유대인 이름이다. 이는 당시 페르시아 제국 내 유대인 인구 비율인 6%를 상회하는 수치다. 샤바타이(Shabbatai), 미냐민(Minyamin), 하가이(Haggai), 아히야마(Ahiyah), 야후나타누(Jonathan) 같은 이름들은 테트라그라마톤(YHWH)이나 그 변형을 포함하고 있어 유대인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활 땅(Bow Land)에서 담보 대출까지: 금융 시스템의 혁명

무라슈와 에기비 가문은 페르시아 제국이 도입한 혁명적 금융 시스템의 핵심 주체였다. 기원전 7세기 이전까지 페르시아의 신용 거래는 주로 신전이 제공하는 현물 대출이나 지주가 농민에게 주는 계절적 곡물 선대였다. 이자가 없거나, 있어도 연체료 형태로 최대 25%에 그쳤다.

유대인 은행가들은 이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이들은 이자부 자본을 민간 기업과 정부 프로젝트에 제공하기 시작했다. 무라슈 가문은 '활 땅(bow land)'—군역 의무와 세금 납부를 조건으로 부여된 봉토—의 토지와 수리권을 임대받아, 이를 다시 가축·종자·장비와 함께 소작농에게 재임대했다. 이들은 또한 부동산 담보 대출을 발행하여 지주들이 자신의 재산을 저당 잡히고 융자를 받을 수 있게 했다.

무라슈 가문은 부재 지주를 위한 부동산 관리, 노동력 고용, 세금 납부, 수익 송금까지 담당했다. 이들은 관개 수로변 소규모 농업 협동조합에 양수 장비를 제공했고, 농민에게 동물·종자·도구를 공급했다. 서판에는 목수·무두장이·뱃사공·양치기·상인·서기 같은 장인 집단과 생산자 협동조합에 대한 금융 지원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심지어 수감된 채무자의 보증금까지 무라슈 가문이 처리했다. 이는 고대 세계 최초의 '투자 은행' 형태였다. 한 가난한 여성 방적공은 사업 확장을 위한 대출을 받았고, 자기 그물도 없던 다섯 명의 어부—그중 한 명은 스바댜(Zebadiah)라는 유대인—는 20일간 그물을 임대할 수 있었다.

니푸르에서 인도까지: 국제 무역 네트워크의 허브

무라슈와 에기비 가문의 활동 범위는 니푸르를 넘어섰다.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동서 무역로 중심에 자리 잡았다. 바벨론과 니푸르는 인도와 중국으로 향하는 육로와 해로의 전략적 허브였고, 유대인 상인들은 이 네트워크의 핵심 결절점을 장악했다.

기원전 550~380년 중국 뤄양(Lo-Yang) 왕릉에서 발굴된 유리 구슬들은 근동 지역, 특히 유다 왕국에서 제작되어 티레와 시돈을 통해 수출된 '눈알 구슬(eye-beads)'과 동일한 기법과 구성을 보인다. 이는 유대인 상인들이 기원전 5세기 이전부터 중국과 교역했음을 증명한다. 당시 유리 제조 기술은 근동 지역에만 국한되어 있었고,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425년에야 페르시아 궁정에서 유리잔을 처음 목격했다.

유대인들은 유리 구슬과 함께 베쉬안(Beth Shean)에서 생산된 최고급 아마포를 중국에 수출했다. 중국인들은 비단만큼이나 서양의 린넨을 귀하게 여겼다. 그 대가로 비단·계피·캐시아(cassia, 계피 껍질)·옥·장뇌 같은 중국 특산물이 서쪽으로 흘러들어왔다. 히브리어 '킨나몬(kinnamon)'은 그리스어 '킨나모몬(kinnamomon)'의 어원이며, 이는 유대인 상인들이 향신료 무역의 중개자였음을 언어학적으로 입증한다.

흥미롭게도, 헤로도토스(기원전 485~425)와 테오프라스투스(기원전 372~286)는 계피와 캐시아가 아라비아에서 자란다고 믿었다. 심지어 스트라보(기원전 60~서기 21)도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를 "계피의 나라"라고 불렀다. 그리스와 로마의 학자들은 1세기까지도 향신료의 진짜 산지를 몰랐다. 유대인 상인들은 무역 비밀을 철저히 지켰던 것이다.

이름을 바꾼 유대인들: 동화와 생존의 딜레마

무라슈 문서는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사회에 점진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많은 유대인이 바벨론식 이름을 채택했지만, 대부분은 외국 신을 지칭하지 않는 중립적 이름을 선택했다. 일부는 페르시아나 이집트식 이름도 사용했다.

유대인들은 농부·어부·목동·목수·관개 기술자로 일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문서에 등장하는 14명의 운하 관리자 전원이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페르시아 제국 농업 경제의 핵심인 관개 시스템을 책임지는 기술 행정가였다. 일부 유대인은 군사 조직에도 편입되었는데, 그달리야(Gedalyah)라는 봉신의 아들은 갑옷을 입고 활을 쏘는 기마병으로 무라슈 가문의 아들을 대신해 자원입대했다. 이는 중세 기사의 가장 이른 전신이다.

또 다른 유대인 예다야(Jedaiah)는 무라슈 은행에 자신의 토지를 저당 잡히고 연간 3만 리터의 보리를 수수료로 지불했다. 3년 후 그는 다른 동업자들과 함께 토지를 확장하여 3배의 임대료를 냈다. 기원전 419년, 예다야의 아들 엘리아다(Eliada)는 페르시아 이름을 가진 사람과 파트너십을 맺어 니푸르 지역 왕실 영지 관리인의 대리인이 되었다.

무라슈 시대의 유대인들은 자본가·대부업자·중간 관리자·군인이 되었다

나만의 에세이: 자본이 만든 새로운 유배—돌아갈 수 없는 자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고 재정까지 지원했다. 그러나 무라슈 문서가 증언하듯, 대부분의 유대인은 돌아가지 않았다. 왜일까? 그들이 바벨론 생활에 만족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일까?

무라슈 문서는 냉혹한 진실을 드러낸다. 알-야후두 시대의 유대인들은 반자유민 신분의 농부였지만, 무라슈 시대의 유대인들은 자본가·대부업자·중간 관리자·군인이 되었다. 이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금융 시스템과 무역 네트워크에 깊숙이 편입되어, 제국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로 변모했다. 예다야의 아들 엘리아다는 페르시아 관료 조직의 일원이 되었고, 그달리야는 제국의 기마병이 되었다. 이들은 더 이상 "포로"가 아니었다—그들은 제국의 공범이었다.

가장 아이러니한 대목은, 이 "성공"이 새로운 형태의 유배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물리적 쇠사슬은 풀렸지만, 자본과 이익의 사슬이 그들을 묶었다. 무라슈 가문은 부재 지주의 부동산을 관리하고, 동족 농민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며, 수감된 채무자의 보증금까지 처리했다. 이는 억압의 피해자에서 억압 시스템의 운영자로의 전환이었다. 키루스의 칙령은 자유를 약속했지만, 무라슈 문서는 그들이 이미 자유보다 더 강력한 것—번영—에 포획되었음을 보여준다.

무라슈 문서가 전하는 교훈은 명료하다. 제국은 폭력만으로 정복하지 않는다. 제국은 기회를 주고, 신용을 제공하고, 지위를 부여하며, 정복민을 체계 안으로 흡수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복민은 스스로 제국을 떠날 수 없게 된다. 알-야후두에서 무라슈로 이어지는 50년은 단순한 경제적 상승이 아니라, 정체성의 재협상이자 영혼의 식민화였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강가에서 울기를 멈췄다. 그들은 이제 장부에 숫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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