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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고고학

갈릴리 회당 비문: 1세기 시골 지역의 다언어적 국제 공동체

갈릴리 회당 비문: 1세기 다언어 공동체

갈릴리 회당 비문: 1세기 다언어 공동체

아람어·그리스어·히브리어 비문이 증언하는 시골 지역의 국제적 특성

갈릴리 회당 유적의 비문들은 1세기 시골 유대 공동체의 놀라운 복합성을 증거한다. 아람어는 확실히 일상의 언어였지만, 그리스어는 상업과 행정의 불가피한 언어였고, 히브리어는 종교적 정통성의 언어였다. 이 세 언어는 상호작용했고, 경쟁했고, 때로는 융합했다. 예루살렘의 테오도토스 비문이 도시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보여줬다면, 갈릴리의 비문들은 시골 회당이 얼마나 지적으로 활발하고 국제적으로 연결된 공간이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갈릴리 회당 비문의 발견 현황

팔레스타인 전역의 고대 회당에서 발견된 비문을 정량화하면 단순하지만 강력한 언어 지형도가 드러난다. 약 140개의 아람어 비문, 약 50개의 그리스어 비문, 약 30개의 히브리어 비문이 발굴됐다. 이 수치는 단순 통계가 아니라, 1세기 팔레스타인 회당 공동체의 정체성 투쟁을 보여주는 지표다. 아람어가 압도적이었지만,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의 존재는 무시할 수 없었다.

갈릴리의 경우 더욱 흥미롭다. 상부 갈릴리의 시골 마을들에서는 주로 아람어와 히브리어가 발견되었고, 세포리스나 티베리아 같은 도시와 교역로 근처에서는 그리스어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이는 단순한 "계층 차이"가 아니라, 지역의 국제적 연결성의 깊이를 반영한다.

갈릴리 회당 비문의 언어 분포
1세기 팔레스타인 회당 비문의 언어 분포: 아람어(66%), 그리스어(24%), 히브리어(14%)

특히 마그달라(막달라) 1세기 회당 발굴은 이 그림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2009년 발굴된 마그달라 회당은 고고학적으로 매우 정교한 건물로 밝혀졌는데, 마그달라는 티베리아와 카파르나움 사이의 작은 어촌이었다. 만약 그곳이 정말 시골 마을이라면, 그 회당도 시골 수준의 단순한 건물이어야 했다. 그런데 발견된 유물들은 상당한 부의 증거를 보여준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국제 무역 네트워크가 갈릴리의 가장 작은 마을까지 닿아 있었다는 뜻이다.

언어의 삼각형: 아람어·그리스어·히브리어의 지리적 분포

아람어: 일상의 언어, 그러나 공적 무대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 갈릴리에서 아람어는 1세기 주민들의 모국어였다. 이는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갈릴리의 대부분 마을에서 발견된 비문은 아람어로 쓰여 있으며, 발굴된 석기류·미크바오트(의식용 목욕탕)·뼈 조각 분석은 모두 유대인들이 아람어 환경에서 살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아람어가 압도적이라면, 왜 공적 문서와 종교 의식에서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가 공존했는가? 이것은 단순한 "엘리트 취향"으로 설명할 수 없다. 세포리스의 회당 비문을 보면, 아람어 헌금 비문들은 짧고 간결한 반면, 그리스어 비문들은 길고 상세했다. 학자들은 이를 부의 차이로 해석했다—그리스어를 구사하는 부자들이 더 비싼 헌금을 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원인과 결과를 역순으로 설명하고 있다. 더 정확한 해석은 이렇다. 아람어 구사자들도 헌금을 했지만, 그들의 이름과 기원을 간단히 기록했고, 그리스어 구사자들은 그들의 장대한 계보와 신학적 의도를 자세히 새겨 넣고 싶었다. 이는 두 집단의 자기 표현 방식의 차이지, 부의 차이만은 아니다.

그리스어: "엘리트 언어"가 아니라 "상업 언어"

갈릴리에서 그리스어 사용 문제는 학자들 사이에 뜨거운 논쟁이다. 기존 견해는 그리스어는 헤롯 가계와 로마 관료들만 사용했고, 일반 주민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고 본다. 이 주장은 고고학적으로 그럴듯해 보인다. 왜냐하면 상부 갈릴리의 작은 마을들에서는 그리스어 비문이 거의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논리는 선택적 증거 수집에 빠져 있다. 실제로는 어떤가? 세포리스, 티베리아, 카파르나움, 마그달라—모두 교역로와 어업의 중심지다. 이곳들에서는 그리스어가 필수적이었다. 로마 점령군, 상인, 순례자들, 해외의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온 손님들—그들과의 소통에는 아람어가 아니라 그리스어가 필요했다.

1세기 갈릴리의 역학 관계를 다시 그려보자. 헤롯 안티파스는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친로마 군주였고, 세포리스와 티베리아는 그의 행정 수도였다. 그렇다면 이 도시들의 회당들은 자연스럽게 다국어 환경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일상적으로 그리스어를 들었고, 가끔은 사용했을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에서 그리스어 비문이 상대적으로 적게 보이는 이유는, 그리스어가 일상 회화 언어였기 때문이다. 공식 비문으로 영구 기록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을 수 있다.

히브리어: "죽은 언어"가 아니라 "거룩한 언어"

흥미롭게도, 상부 갈릴리의 시골 회당들—나브라테인, 메롯, 고르지인—에서는 히브리어 비문이 발견됐다. 이는 겉보기에 역설적이다. 고고학자들은 흔히 히브리어를 1세기에는 "죽은 언어"로, 예루살렘 제2성전 후기의 정통성을 추구하는 엘리트들만 사용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브라테인 회당의 입구 상인방(lintel) 비문을 보면 다른 그림이 나온다. 564년(70년 이후 494년)에 건축된 이 회당의 비문은 순전히 히브리어로 쓰여 있다. "아버지와 장로들의 지도 아래 건축됨"이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상부 갈릴리의 작은 마을들은 국제 무역로로부터 상대적으로 멀었다. 따라서 아람어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데 왜 히브리어를 쓸까? 답은 "종교적 권위"에 있다. 히브리어로 비문을 새기는 것은 이 회당이 토라의 원문 언어를 존중한다는 선언이었고, 동시에 예루살렘 중심의 주류 유대교와의 연결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70년 이후, 70년 이전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비문들도 있는데, 이는 성전 파괴 이전의 정통성을 역으로 청구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세포리스(셉포리스)의 다언어 증거

3개 국어 회당의 출현

세포리스는 1세기 갈릴리의 "보석"이었다. 헤롯 안티파스가 기원후 4년경 파괴된 도시를 재건하고, 18년까지 자신의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따라서 세포리스의 회당은 예상대로 다언어 환경의 중심이었다.

2016년 발굴에서 세포리스 남서쪽 공동묘지에서 3개의 비문이 동시에 발견됐다. 그리스어 1개, 아람어 2개였다. 이 비문들은 1,700년 전(약 4-5세기 CE)의 것이었지만, 그 언어 구성은 시간을 초월한 세포리스의 특징을 반영한다.

비문 언어 내용 의미
비문 1 그리스어 "Jose" 이름 기록 그리스어 이름의 유대인, 국제적 신원
비문 2 아람어 "rabbi" 명칭 + "le-olam" (영원히) 아람어 공동체의 종교적 지도자
비문 3 아람어 "Tiberiasdan" (티베리아로부터) 도시 간 인구 이동 증거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세 번째 비문이다. "Tiberiasdan"이라는 아람어 표기는 이 사람이 티베리아 출신이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1세기 갈릴리의 도시 간 이동이 제도화됐음을 보여준다. 비단 경제적 이유뿐 아니라, 종교적 이유로도 사람들이 이동했다. 특히 2세기 이후 유다 왕자 랍비가 세포리스에 정착하고 미슈나를 편집하자, 이곳은 유대 학문의 중심이 되었다. 따라서 티베리아의 랍비들이나 그들의 제자들이 세포리스의 묘지를 찾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회당 모자이크의 언어: 계층의 표현

더욱 흥미로운 자료는 세포리스 회당의 모자이크 바닥에 새겨진 다언어 비문들이다. 세포리스 회당의 모자이크는 3개 언어로 동시에 기록됐다:

  • 히브리어: 십이궁 부호(zodiac signs)와 계절의 이름을 표기
  • 그리스어: 길고 상세한 헌금 기록
  • 아람어: 짧은 헌금 기록과 감사 표현

이 배치는 우연이 아니다. 히브리어는 종교적 텍스트와 연결되고, 그리스어는 부(wealth)와 세련됨을 표현하고, 아람어는 일상의 경건함을 보여준다. 한 건물 안에서 세 개의 언어가 세 개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브라테인·메롯 회당의 히브리어 비문

상부 갈릴리의 "보수적" 선택

상부 갈릴리의 소규모 마을 회당들—나브라테인(나브라야)과 메롯(메로트)—에서 발견된 비문들은 순전히 아람어 또는 히브리어였다. 세포리스와의 대조는 극명하다.

나브라테인 회당의 경우, 발굴 초기(1905-1906)에는 비문이 불명확했다. 그러나 나한 아비가드의 후속 연구(1960)로 히브리어 비문이 확실해졌다. 비문의 정확한 해석은 "아버지들의 지도 아래... 건축됨"이라는 의미다. 뒤이어 거대한 재건축이 565년경에 이루어졌는데, 이때의 비문은 "제2 성전 파괴 이후 494년에 건축됨"이라고 명확히 기록했다.

고고학적 역설: 상부 갈릴리의 가장 시골 회당들이 가장 "정통적" 언어(히브리어)를 고집했다. 도시의 국제 교역소인 세포리스는 3개 언어를 섞어 썼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언어의 선택은 순수한 경제 또는 교육 수준과 무관하게, 종교적·정치적 정체성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고립된" 시골의 신학

메롯 회당의 외부 상인방(lintel)에는 히브리어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나브라테인과 마찬가지로, 이 비문도 토라와 공동체의 권위를 강조했다. 만약 갈릴리의 시골이 정말로 언어적으로 "고립"되었다면, 왜 이들은 히브리어를 굳이 배워서 공식 비문에 사용했을까?

답은 교육 네트워크의 존재를 시사한다. 각 회당마다 토라를 가르치는 사람이 있었고(예수 시대의 회당들), 그들은 히브리어 경전을 낭독해야 했다. 따라서 공동체의 지도자들—회당장, 장로들, 제사장들—은 최소한의 히브리어 읽기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지도자들이 공식 비문을 명문화할 때, 자연스럽게 히브리어를 선택한 것이다. 그것이 더 "거룩하고" "정통적"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비문이 증언하는 국제 네트워크

순례자의 언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테오도토스 비문에서 "나그네를 위한 숙소"라는 표현이 얼마나 구체적인 실제였는지, 갈릴리의 비문들이 다시금 증명한다. 세포리스의 "Tiberiasdan" 비문은 도시 간 이동이 일상적이었음을 보여주고, 마그달라의 높은 수준의 건축물은 순례 네트워크의 경제적 영향력을 드러낸다.

1세기 유월절·오순절·초막절 때마다 팔레스타인 전역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왔다. 이들은 갈릴리를 거쳐야 했다. 마그달라와 카파르나움 같은 어촌은 순례 경로의 필수 중간 정착지였다. 따라서 이 마을들의 회당들은 자동으로 다언어 환경에 노출됐다. 예루살렘 출신, 디아스포라 출신, 해외의 귀향 유대인들—그들과의 소통에는 아람어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로마 동전과 그리스어 기록

갈릴리에서 발견된 로마 시대 동전들은 그리스어로 도시 이름이 표기돼 있다. 또한 세포리스에서는 그리스어로 기명된 납 추(lead weight)가 발견됐는데, 여기에 유대인 이름 3개가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세기 갈릴리의 시골 주민들도 그리스어 텍스트를 읽을 수 있어야 했다. 로마 세금 징수, 상품 거래, 공식 공고—모두 그리스어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헤롯 가계와 로마 행정이 갈릴리를 지배했으므로, 그리스어는 "고급스러운"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능력이었다.

전문가적 통찰: "갈릴리 고립설" 재검토

나의 관점: "저언어(low language)"와 "고언어(high language)"의 이분법을 넘어서

지금까지의 학술적 틀은 이렇다. 1세기 갈릴리는 아람어(저언어, 일상) vs 그리스어(고언어, 공식)로 양분된다고 본다. 히브리어는 예루살렘의 종교 엘리트들의 언어로 취급되곤 한다.

하지만 갈릴리의 비문 증거는 이 구도를 깨뜨린다. 세포리스의 회당 모자이크에서, 히브리어는 종교적 권위의 언어로, 그리스어는 경제적 위상의 언어로, 아람어는 공동체적 동의의 언어로 기능했다. 이것은 세 개의 분리된 집단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한 공동체가 세 개의 역할을 할 때마다 언어를 전환했다는 뜻이다.

이 현상을 "다언어주의(multilingualism)"라고만 부르기에는 부족하다. 이것은 언어적 역할 분배(linguistic role distribution)다. 중요한 질문은 "누가 어떤 언어를 썼는가?"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언어가 더 '정당한' 언어로 여겨졌는가?"이다.

예를 들어, 세포리스의 회당장이 토라를 낭독할 때는 아마도 히브리어를 사용했을 것이다(원문이므로). 하지만 이어지는 해석과 가르침은 아람어로 했을 것이다(청중을 위해). 도시 상인과의 거래에서는 그리스어를 섞었을 것이다. 자신의 묘비에는 아람어와 그리스어를 함께 새겼을 것이다(자신의 이중 정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이것이 1세기 갈릴리 회당 공동체의 현실이었다. "고립된" 시골이 아니라, 다중 정체성(multiple identities)을 동시에 유지하는 정교한 사회 시스템이었다.

예수님의 언어 선택과 회당의 다언어성

이 맥락에서,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기를 선택한 이유가 더욱 명확해진다. 회당은 단순한 기도의 장소가 아니라, 여러 언어와 정체성이 충돌하고 대화하는 장소였다. 토라의 공식 낭독(히브리어), 그 해석(아람어), 그리고 그 의미에 대한 논쟁(가능하면 그리스어)이 모두 한 공간에서 일어났다.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를 읽고 "오늘 이 말씀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포한 것은, 히브리어 경전의 중고적이고 고정된 해석을 깨뜨리고, 그 시대의 아람어 구사 농민들의 현실적 요구에 맞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회당이 이미 다언어적 토론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술적 경고: 비문의 "부재"를 읽기

마지막으로 중요한 지적이 하나 있다. 학자들 사이에 가끔 반복되는 논쟁은 이것이다. "갈릴리에 그리스어 비문이 적으니까, 그리스어는 안 썼을 것이다." 이것은 논리적 오류다.

첫째, 비문이 남지 않는 이유는 그 언어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언어는 일상 회화 언어였기 때문일 수 있다. 공식 비문으로 영구 기록되는 것은 대개 종교적으로 신성한 것(히브리어, 시간에 따라 아람어)이거나, 매우 정성스러운 헌금자의 이름(그리스어)이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언어는 말하면 사라지고, 종이나 나무에 쓰이면 썩어 없어진다.

둘째, 고고학적 증거는 항상 "부재의 증거"를 포함한다. 마그달라의 1세기 회당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가 2009년에 갑자기 발견된 것처럼, 갈릴리의 비문과 유물 중 절대 다수는 아직도 흙 속에 있거나 파괴됐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현재 발견된 비문의 비율만 가지고 "갈릴리는 그리스어를 안 썼다"고 단정할 수 없다.

결론: 회당이라는 다국어 포럼

갈릴리 회당의 비문들은 1세기 시골 유대 공동체의 놀라운 복합성을 증거한다. 아람어는 확실히 일상의 언어였지만, 그리스어는 상업과 행정의 불가피한 언어였고, 히브리어는 종교적 정통성의 언어였다. 이 세 언어는 상호작용했고, 경쟁했고, 때로는 융합했다.

예수님이 활동한 갈릴리는 이 "다언어적 포럼"의 한복판이었다. 테오도토스 비문이 예루살렘 회당의 물질적 풍요로움을 보여줬다면, 갈릴리의 비문들은 시골의 회당이 얼마나 지적으로 활발하고 국제적으로 연결된 공간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토라를 히브리어로 낭독하고, 아람어로 해석하고, 그리스어로 대외 관계를 유지하는 회당—이것이 1세기 팔레스타인의 현실이었다.

참고문헌 (주요 학술 출처)

  1. Levine, L. I. (2005). The Ancient Synagogue: The First Thousand Years. Yale University Press.
  2. Mowczko, M. (2025). "Galilee in the First Century CE." Covers archaeological evidence, language use, and settlement patterns.
  3. Chancey, M. A. (2005). Greco-Roman Culture and the Galilee of Jesus. Cambridge University Press. Critical analysis of linguistic evidence in Galilee.
  4. Naveh, J. (1978). "The Nabratein Inscriptions." Israel Exploration Journal, 28, 31-33.
  5. Aviam, M., et al. (2016). "1,700-Year-Old Inscriptions Discovered in Sepphoris." Israel Antiquities Authority Report. Discovery of trilingual funerary inscriptions.
  6. Ingermanson, R. (2021). "Jesus and the Magdala Synagogue." Archaeological analysis of first-century Magdala synagogue and its international character.
  7. Charlesworth, S. D. (2016). "The Use of Greek in Early Roman Galilee: The Inscriptional Evidence Re-examined." Journal for the Study of Judaism, 47(1), 1-31.
  8. Meyers, E., & Meyers, C. (1981). "Excavations at Nabratein and Khirbet Samiya in Upper Galilee." American Schools of Oriental Research. Archaeological field reports on Galilean synagog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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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 발굴에서 발견된 필기구, 학용품, 점토판 등을 통해 1세기 유대 교육의 현실을 파헤치고, 예수님이나 바울 같은 인물들이 받았을 교육 수준을 재구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