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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고고학

테오도토스 비문: 회당의 진짜 기능

테오도토스 비문: 회당의 진짜 기능

테오도토스 비문: 회당의 진짜 기능

예루살렘 1세기 비문이 증언하는 회당의 다중적 역할과 예수님의 사회적 맥락

테오도토스 비문은 단순한 석판이 아니다. 이것은 1세기 예루살렘 회당의 실제 정체를 고발하는 고고학적 증거다. 기독교 전통에서 흔히 그려지던 "기도하는 곳"이라는 낭만적 이미지를 한 칼에 베어버린다. 해당 비문은 회당이 얼마나 광범위한 사회 기능을 담당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테오도토스 비문: 발견과 기본 정보

언제, 어디서 발견되었는가?

테오도토스 비문은 1913~1914년 예루살렘 다윗 성 남쪽 저수지에서 발견됐다. 그리스어로 쓰인 석회암 판이었다. 비문은 기원전 1세기 말~기원후 1세기 초로 추정되며, 헤롯 대왕의 성전 재건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70년 멸망되기 약 100년 전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

비문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베테노스의 아들이자 제사장인 테오도토스는 회당장이자, 회당장의 아들이자, 회당장의 손자로서, (저 회당을) 아버지들과 장로들과 시몬데스가 함께 세운 회당을 토라의 낭독과 계명의 가르침 그리고 나그네(외국인) 손님을 위한 숙소, 방들, 수도 시설을 위하여 지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세 가지 명확한 목적이 명시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기도 장소"가 아니라는 뜻이다.


회당의 세 가지 핵심 기능

1) 종교적 기능: 토라 낭독과 가르침

토라 낭독이 중심이었는가?

당대 문헌과 고고학 증거는 일관되게 토라 낭독과 그 해석을 회당의 최우선 기능으로 꼽는다. 누가복음 4장 16절은 "예수께서 ... 회당에 가시니 ... 일어서서 읽으려 하시매"라고 기술한다. 이는 회당 예배의 핵심이 낭독이었음을 암시한다.

요세푸스와 필로의 기록에 따르면, 토라는 3년 주기로 154~155개 단위로 나뉘어 낭독됐다. 회당의 건축 구조 자체도 이를 반영했다. 갈릴리에서 발굴된 감마(Gamla)와 막달라(Magdala) 회당의 고고학적 유구는 중앙에 강단(bimah) 같은 구조가 있어, 회중이 그곳에서의 낭독을 집중해서 듣도록 설계됐음을 보여준다.

경전 해석의 권력

회당에서는 단순 낭독만이 아니라 해석(exegesis)도 일어났다. 신약 사료들은 예수와 바울이 회당에서 "가르쳤다"는 표현을 반복한다. 이는 누군가 토라를 공개적으로 설명했다는 뜻이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는 토라를 읽을 수 있는 자면 누구나 그것을 해석할 수 있었다. 따라서 회당은 경전 해석의 민주적 무대였고, 이것은 기득권층의 반발을 샀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 1장 22절에서 사람들이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이라 놀라는 것은, 예수의 해석 방식이 당시의 정통적 랍비 전통과 달랐음을 암시한다.

2) 사회적·정치적 기능: 법정, 문서보관, 교육

회당은 법정이었다

신약성서와 고고학 증거는 회당이 지역 분쟁을 판결하는 장소였음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10장 17절과 누가복음 12장 11절은 예수 제자들이 "회당에 넘겨"질 것이라 경고한다. 이는 회당이 형사·민사 사건을 다루는 법정 역할을 했다는 증거다.

요세푸스와 미슈나 문헌에 따르면, 회당장과 장로들로 구성된 회당 공의회(sanhedrin)는 이혼, 재산 분쟁, 안식일 위반 등을 판결했다. 이 판결은 상당한 강제력을 가졌는데, 심지어 형벌(채찍질)도 집행될 수 있었다.

문서 보관소이자 재정 중심

회당은 회중의 '기록 보관소(archive)'였다. 토라 두루마리뿐 아니라 지역 법령, 법적 계약, 헌금 기록 등이 보관됐다. 또한 회당은 지역 재정 중심이었다. 유대인 전체가 드리는 성전 세금(연 2데나리온)은 회당을 통해 수집됐고, 회당은 또한 지역의 기금을 관리했다.

학교이자 교육 중심

회당은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지역의 유일한 공교육 기관이었다. 성인 남성들은 토라를 학습했고, 어린이들은 문해력과 종교적 전승을 배웠다. 토라가 주요 교과서였지만, 다른 과목들도 모두 토라의 맥락 속에서 가르쳐졌다.

3) 지역 사회 서비스: 나그네의 숙소와 수도 시설

테오도토스 비문의 진정한 혁신성

비문이 명시한 "나그네(외국인)를 위한 숙소, 방들, 수도 시설"이라는 부분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이는 회당이 단순한 예배 공간이 아니라 실제 운영되는 여행자 숙소였음을 의미한다.

당시 예루살렘은 연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때마다 수십만 명의 순례자가 몰려들었다. 이들은 모두 숙소가 필요했고, 상업적 여관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따라서 각 회당(특히 같은 지역 이민자들의 회당)은 의무적으로 나그네를 접대했다. 특히 로마에서 온 유대인들의 회당이었다면, 로마에서 온 순례자들을 받았을 것이다.

물 공급 시설의 중요성

"수도 시설(水道 施設)"이라는 표현도 무시할 수 없다. 고고학 발굴에서 발견된 회당들은 분수, 저수조, 세숫대야 같은 물 공급 장치를 갖추고 있었다. 이는 두 가지 기능을 했다:

  1. 종교적 정결(purification): 유대교 율법(할라카)은 회당 출입 전 손을 씻을 것을 요구했다.
  2. 생활 편의: 여행자들이 목욕하고, 음수하고, 빨래할 수 있게 했다.

당시 예루살렘의 물 공급은 심각하게 부족했고, 여름에는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회당의 수도 시설은 실제 생존 문제였다.

1세기 회당의 다중 기능
1세기 회당의 다중 기능: 종교, 사회, 지역 봉사의 삼원 구조

예수님 활동의 사회적 맥락

회당은 예수님의 선택한 무대였다

네 복음서 모두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쳤다고 일관되게 증언한다. 마가복음 1장 39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마태복음 4장 23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회당은 공개적이고 민주적인 말씀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인으로 읽을 수 있는 자면 누구든 입을 열 수 있었다. 따라서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일어서 이사야 61장을 읽고 "오늘 이 말씀이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누가복음 4:21)고 선포한 것은, 당시의 정통 신학에 대한 공개적 도전이었다.

회당에서의 가르침의 특징

예수님의 회당 사역은 단순한 설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호작용적 해석이었다. 마가복음 1장 21-28절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논쟁"하고 "묻고" "토론"했다. 요한복음 18장 20절에서 예수님 자신이 증언한다: "나는 항상 회당과 성전에서 ... 공개적으로 가르쳤노라."

흥미롭게도, 당시 회당에서는 예수님 같은 인물들이 나타났다. 초대 기독교 이전에도 회당은 여러 경쟁하는 교사들—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추종자들, 심지어 독립적인 예언자들—의 무대였다. 회당은 이념의 경쟁장이자, 동시에 공동체의 통합 기관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의 등장은 이 긴장 관계 속에서 일어났다.

회당에서의 충돌

하지만 예수님의 회당 활동은 순탄하지 않았다. 누가복음 13장 10-17절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병자를 고쳤을 때 회당장의 반발을 받은 사건을 기술한다. 마가복음 3장 1-6절은 바리새인들과 헤롯 편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민 장소를 회당으로 설정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회당 체제 자체에 질문을 던졌음을 암시한다. 회당이 비록 토라 낭독과 공동체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그것이 민중의 해방(liberation)을 가져왔는가?

예수님이 회당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당시 민중이 모이는 가장 유일하고 합법적인 공개 무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그 무대에서 기존의 권력 구조에 도전했다.

역사적 맥락: 테오도토스 비문의 진정한 의의

1세기 회당의 계층 구조

테오도토스 비문은 자신을 "제사장이면서 회당장, 그리고 회당장의 아들이자 손자"라고 명시한다. 이는 회당 지도부가 세습적 엘리트 구조였음을 의미한다. 물론 회당은 성전과 달리 제사 의례가 없었지만, 사제 신분은 여전히 권위를 부여했다.

또한 비문은 비문을 세운 테오도토스가 숙소를 건설했다고만 하지, 회당을 "지었다"고 명시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아버지들과 장로들과 시몬데스가 함께 세운"이라고 명기한다. 이는 회당의 집단적 설립과 운영을 암시한다.

헬레니즘 자선 전통과의 비교

테오도토스 비문의 양식은 그리스-로마 세계의 자선 헌금 비문과 매우 유사하다. 즉, 테오도토스는 자신의 기여를 기록함으로써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취했다. 이는 선의의 자선이라기보다는 "파트로나주(patronage)" 제도의 일환이었다—부자가 공동체에 투자함으로써 그들의 권력과 명성을 강화하는 관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문은 회당이 실제로 그러한 공공 역할을 수행했음을 증명한다. 자선의 동기가 무엇이든, 회당은 나그네를 받고 물을 공급하고 교육을 제공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의 변화

흥미로운 점은 70년 이후 회당의 기능이 급격히 변했다는 것이다. 성전이 파괴되자, 회당은 더 이상 성전의 "보조 기관"이 아니라 유대 공동체의 유일한 중심이 되었다. 그 결과 기도(prayer)가 토라 낭독만큼 중요해졌다. 70년 이후의 회당들은 예루살렘을 향해 지어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온 회중이 성전을 추모하며 기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테오도토스 비문은 1세기 성전이 여전히 온존했을 때 회당의 기능을 보여주는 희귀한 증거다. 이는 회당이 성전을 대체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성전 존속 기간 동안 이미 독립적인 지역 공동체 센터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전문가적 통찰: 테오도토스 비문의 재평가

학계에서는 테오도토스 비문을 다양하게 해석해왔다. 일부 학자는 그것을 회당의 "종교적" 기능에만 초점을 맞추고, 나그네 숙소를 부가 기능으로 취급했다. 하지만 더 설득력 있는 관점은 이렇게 보는 것이다:

회당은 애초부터 '다목적 커뮤니티 센터'였고, 토라 교육과 나그네 접대는 동등한 가치의 두 축이었다.

왜인가? 당시 유대 사회는 성전 순례자들의 '유입'이라는 실질적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연 3회의 절기 때마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온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집중됐다. 현지 회당들은 이들을 받을 의무를 가졌고, 동시에 이것은 정치·사회적 네트워킹의 기회였다.

로마 출신 유대인들의 회당은 로마에서 온 순례자들을 통해 연락을 유지했고, 그들의 기부금과 경험담은 회당의 위상을 높였다. 따라서 테오도토스 비문은 우리에게 다음을 말해준다:

1세기 회당은 종교와 사회, 교육과 복지, 정통성과 개방성을 모두 담아낸 '일상의 민주주의 기관'이었다. 예수님이 회당을 선택한 것은 그것이 당시 민중이 모이는 가장 유일하고 합법적인 공개 무대였기 때문이다.

회당은 기도 공간 그 이상의 장소였다

참고문헌 (주요 출처)

  1. Levine, Lee I. The Ancient Synagogue: The First Thousand Years. Yale University Press, 2005.
  2. Binder, Donald D. Into the Temple Courts: The Place of the Synagogue in the Second Temple Period. SBL Press, 1999.
  3. Kloppenborg, John S. "The Theodotus Inscription and the Early Synagogue." Journal of the Ancient Near Eastern Religions, vol. 10, no. 2, 2010.
  4. Runesson, Anders. The Origins of the Synagogue: A Socio-Historical Study. Fortress Press, 2001.
  5. Turnage, Marc. "Theodotus Synagogue Inscription." Biblical Expeditions, 2021.
  6. Josephus. Antiquities of the Jews. Translated by William Whiston, various editions.
  7. Philo of Alexandria. Legatio ad Gaium (Embassy to Gaius). Various translations.
📝 후속 글 예고

"다음 편에서는 '갈릴리의 회당 유적에서 발견된 아람어와 그리스어 비문들'을 통해, 1세기 시골 지역의 회당 공동체가 얼마나 다언어적이고 국제적이었는지 파헤쳐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