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비문의 진실: 황제의 경고가 예수를 겨냥했다는 가설은 왜 무너졌나
핵심 결론: 이 비문이 예수의 부활을 막으려는 로마의 증거라는 주장은, 2020년 과학적 검증으로 거의 확실히 폐기되었다. 하지만 학계의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그 이유가 흥미롭다.
지난 140년간 기독교 변증가들과 보수 신학자들은 나사렛 비문을 '성경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최고의 물리적 증거'로 떠받들었다. 로마 황제가 무덤 도굴꾼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는 내용이 마치 예수의 부활 소식에 공포감을 느낀 당국의 '자백'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그런데 2020년, 동위원소 분석이 이 '행복한 착각'을 산산조각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이 여전히 강하게 저항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과학이 말을 할 수 없는 영역에서 역사가들의 '신념 게임'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 목차
1. 비문의 정체: 대리석 위의 살벌한 경고
이 비문은 1878년 프랑스 수집가 빌헬름 프뢰너(Wilhelm Fröhner)가 획득했다. 그의 개인 수집 목록에 남은 기재는 단 세 줄: "Dalle de marbre envoyé de Nazareth en 1878" (나사렛에서 받은 대리석). 이 메모 하나가 역사를 지배했다.
비문의 규격은 높이 약 61cm, 너비 약 38cm의 우아한 대리석 판이다. 헬라어 22줄이 빼곡히 새겨져 있으며, 내용은 당대 황제의 칙령(Edictum) 형식을 따르고 있다. 번역하면 이렇다:
무덤과 묘지를 훼손하는 자에 대하여... 누군가가 악의적으로 시신을 옮기거나 비석을 제거하는 행위를 저질렀다면, 나는 그에게 '무덤 도굴죄(periairesis)'를 적용하여 사형(kephaliken tinas)에 처할 것을 명한다.
로마법에서 무덤 도굴은 엄연한 중죄였다. 그런데 보통은 벌금형이나 추방형으로 처리되었다. 사형이 명시된 황제 칙령은 극히 이례적이었다. 여기서부터 신학자들의 상상력이 발화했다.

2. 글라우디오 가설: 왜 그렇게 설득력 있었나
1930년, 벨기에 역사가 프란츠 쿠몽(Franz Cumont)이 이 비문을 학계에 소개했다. 그는 비문을 글라우디오 황제(Claudius, AD 41-54) 시대의 산물로 추정했고, 이 가설은 보수적 기독교학계에서 거의 도그마처럼 자리잡았다.
논리는 이렇다:
- 팩트: 예수 십자가 처형은 약 AD 30년. 제자들은 "빈 무덤"을 근거로 부활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 문제: 로마 당국 입장에선 이것이 사회적 소요(폭동)의 불씨로 보였을 것이다.
- 결론: 글라우디오 황제가 AD 41-54년 사이, 갈릴리 나사렛에 경고문을 세워 "제자들의 시체 도둑질(부활 조작)은 사형"이라고 선포했다.
마태복음 28장 11-15절을 보면:
경비병들이 일어나 대제사장들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아뢰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여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자는 동안에 그를 도둑질했다고 말하라 하고...
얼마나 완벽하게 들어맞는가? 비문의 살벌한 경고가 마치 이 마태복음 기사의 '역사적 배경'을 증명해 주는 셈이었다. 신학생들은 강단에서 열광했고, 기독교 변증가들은 이를 "로마가 자신도 모르게 부활의 역사성을 입증한 증거"라고 선포했다.
문제는 이 가설이 프뢰너의 한 줄 메모에만 의존했다는 것이었다.
3. 2020년 동위원소 분석: 코스 섬의 배신
2020년 4월, 미국 오클라호마 대학의 Kyle Harper 교수를 필두로 한 국제 연구팀이 《저널 오브 아케올로지컬 사이언스(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에 폭탄을 터뜨렸다. 그들은 비문의 뒷면을 미세하게 긁어내 탄소와 산소 동위원소 분석을 실시했다.
과학의 답변은 냉정했다:
이 대리석의 화학적 '지문'(Fingerprint)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것이 아니었다. 로마 본토의 것도 아니었다. 그리스의 섬 '코스(Kos)'의 채석장에서 나온 대리석이었다.
탄소 13의 증가와 산소 18의 감소—이 미묘한 비율의 변화가 모든 것을 뒤집어 버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갈릴리의 작은 촌동네 나사렛에 황제의 칙령을 세우려고 했다면, 굳이 지중해 건너 그리스 섬에서 대리석을 깎아 수입해 왔을까? 로마 행정가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 물류 비용도 엄청나고, 현지 조달이 원칙이었다. 현대로 치면 공사비 낭비인 것이다.
동위원소 분석은 비문이 애초에 나사렛에 세워진 적이 없을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을 가리켰다.

4. Nikias와 Crinagoras: 빠진 퍼즐 조각
Harper 연구팀은 "그렇다면 이 비문의 진짜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코스 섬의 역사를 뒤진 결과, 그들이 찾아낸 것은 기원전 1세기의 한 비극이었다.
코스 섬의 독재자 니키아스(Nikias)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기원전 30년경 사망했는데, 시간이 흐르자 섬사람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들은 그의 무덤을 강제로 개방하고 시신을 끌어낸 뒤 모욕을 가했다.
이 사건은 어떻게 우리에게 전해졌을까? 당대의 그리스 시인 Crinagoras의 에피그램에 남았다:
"Look at the fate of Nicias of Cos. He had gone to rest in Hades, and now his dead body has come again into the light of day. For his fellow-citizens, forcing the bolts of his tomb, dragged out the poor hard-dying wretch to punishment." (「쿠스의 니키아스를 봐라. 그는 하데스에서 안식을 취했는데, 이제 그의 시신이 다시 빛 속으로 나왔다. 동료 시민들이 무덤의 자물쇠를 강제로 열어 저 불쌍한 죽음을 맞이한 자를 처벌하기 위해 끌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황제의 경고는?
아우구스투스 황제(BC 27 - AD 14)는 나중에 이런 '정치적 보복'으로 인한 무덤 훼손을 엄격히 금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니키아스 같은 유명 인물의 무덤이 정치적 앙금으로 인해 다시 훼손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코스 섬의 대리석이 이 칙령을 새겨낸 공식 석판이었을 가능성이 Harper 팀의 추정이다.
시기도 맞아떨어진다. 비문의 그리스어 문체와 자료 분석 결과는 AD 1세기 초반(글라우디오보다 약 50년 앞)을 가리킨다.
5. 학술적 반격: Clyde Billington의 '옹호 시도'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학계가 Harper의 주장을 전부 수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보수적 기독교 신학자 Clyde Billington은 자신의 2021년 저서에서 Harper의 결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의 주요 반박을 정리하면:
1. Nikias 사건의 역사성 문제
- Nikias의 무덤 훼손 사건은 오직 Crinagoras의 시적 텍스트에만 기록되어 있다.
- 공식 역사 문헌이나 비문 같은 1차 사료에는 이를 확인할 수 없다.
- "시인의 에피그램"이 정말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는지, 아니면 순수 시적 허구인지 불명확하다.
2. 황제의 개입 동기 의문
- 니키아스는 안토니우스(Antony) 측의 동료였다.
- 왜 아우구스투스 황제(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정치적 대항자와 연결된 사람의 무덤 훼손에 그렇게까지 공을 들였을까?
- 오히려 방관하거나 묵인했을 가능성도 있다.
3. 비문의 특정 어구
- Billington은 비문의 특정 표현들("시신 이동", "무덤 개방")이 마태복음 28장의 "빈 무덤" 이야기와 더 정확히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 아우구스투스 시대보다 글라우디오 시대의 갈릴리 상황이 비문의 맥락과 더 부합한다고 본다.
정리하면: Billington의 논리는 "코스 섬이 아니라면, 왜 굳이 다른 곳일까? 나사렛이 가장 자연스럽지 않은가?"라는 '역에 기대는' 주장이다.

6. 에세이: 돌 하나가 신앙을 보증할 수 없는 이유
지난 30년간 기독교 강단과 대중 강연에서 나사렛 비문은 성경의 역사성을 증명하는 완벽한 증거처럼 소비되었다. "봐라, 로마 황제 자신이 빈 무덤의 역사성을 입증했다!"는 식의 선전은 너무나 통쾌했고,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사렛 비문의 사례는 우리에게 세 가지 뼈아픈 교훈을 안긴다.
첫째, "보고 싶은 대로 보면, 결국 배신당한다."
프뢰너의 메모 "Dalle de Nazareth"가 140년간 학계를 지배했다. 과연 그것이 정확한 출처 기재였을까? 아니면 수집가의 대충한 기록이었을까? 우리는 근거 없이 그것을 믿었다. 왜? 그것이 우리의 기대와 일치했으니까다. 이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약점을 드러낸다.
둘째, 과학은 신앙의 '증명'이 될 수 없다.
동위원소 분석이 비문의 출처를 바꾸었다고 해서, 예수의 부활이 거짓이 되었는가? 아니다. 반대로 비문이 정말 글라우디오 시대의 나사렛 것이었다면, 부활이 과학적 사실이 되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돌은 돌일 뿐이다. 그것이 어디서 나왔든, 누가 세웠든, 신앙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셋째, 학문은 '신념의 게임'이다.
Harper의 동위원소 분석은 매우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다. 그런데 Billington은 여전히 자신의 해석이 맞다고 주장한다. 둘 다 같은 과학 자료를 보고 있는데 왜 결론이 다를까? 그것은 '전제(Presupposition)'의 차이이기 때문이다.
- Harper: "비문은 코스 섬의 것이고, 따라서 Nikias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 Billington: "비문은 예수 부활 사건과 관련이 있고, 따라서 나사렛의 것이어야 한다."
둘 다 합리적인 논리를 펼치지만, 어디서 시작하는지에 따라 도착점이 달라진다. 이는 모든 학문의 숨은 진리다. 우리는 중립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이미 어떤 확신을 품은 참여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독교 변증이 싸구려 음모론이 되지 않으려면, 과학과 역사에 대해 더 겸손해야 한다. "이것 봐라, 성경이 맞지 않느냐!"라고 호들갑을 떨기 전에, "그 돌이 진짜 어디서 굴러먹다 온 돌인지, 우리가 제대로 확인했는가?"라고 자문할 수 있는 차가운 이성이 필요하다.
진리는 팩트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다. 오히려 팩트를 외면하는 믿음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다. 한 걸음 물러서서 나 자신의 '전제'를 점검하는 것, 그것이 학자와 신자 모두에게 필요한 자세다.
📚 참고 문헌
주요 학술 자료:
Harper, K., McCormick, M., Hamilton, M., Peiffert, C., Michels, R., & Engel, M. (2020). Establishing the provenance of the Nazareth Inscription. Journal of Archaeological Science, 118, 105140.
Billington, C. (2021). Jesus in the First Three Centuries: Reassessing the Role of Jesus in the World and Faith Community During the First Three Centuries of the Christian Era. Salem Publishing.
Cumont, F. (1930). Les règles de l'épigraphie pour l'étude des religions. Revue des Études Grecques, 43, 27-47.
원전 자료:
Crinagoras. (n.d.). Epigrams. Greek Anthology, Book IX, 81.
Attalus. (2016). Crinagoras: Epigrams. Retrieved from www.attalus.org/poetry/crinagora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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